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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기사 한 꼭지에 돌이킬 수 없게 된 정치인생

선배 의원의 ‘언론 조심’ 조언 경청 안 한 탓 기도 끝에 꿋꿋하게 공격에 맞서기로 결심 내가 만약 공화당원이 아니고 민주당원이었다면 나를 향해 LA타임스가 공격했을까. 나 스스로 골백번도 넘게 물었다. ‘큰 통에 들어있는 잉크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You can not beat the barrel of ink)’는 말이 있다. 무한정 글을 쓸 수 있는 언론을 상대로 싸워 봤자 본전도 뽑지 못한다는 얘기다. 미국 주류언론 절대다수가 좌성향이 강하다. 특히 보수진영, 공화당원 사이에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는 '급진좌파 언론' 혹은 '안티 보수 언론'으로 통한다.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들 언론 사설은 민주당원들의 연설 내용과 싱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기사도 대단히 편향적이다. 지금은 언론의 편향성이 극에 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들 언론이 나에 대한 빌미를 찾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주류언론이 아시안 공화당원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공화당 선배들로부터 각별히 조심하라는 충고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TV 방송사 중에서는 CBS와 NBC를 조심하라” 등과 같은 조언이었다. 이들 방송국이 철저하게 민주당 편에 서 있다는 설명이었다. 솔직히 나는 무지했다. 당시 공화당 선배들이 왜 입만 열면 그렇게 언론 얘기를 자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어렵게 자랐던 시절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등 언론들은 이름만 들어도 상당한 무게감을 줬다. 막연하지만 뭔가 격이 높고, 수준이 높은 느낌을 줬다. 최고 선진국인 미국은 언론도 당연히 최고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 공화당 의원들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았다.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잔소리 같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한다. 당시 나는 매일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최초의 공화당 아시안 이민자 의원’ ‘최초의 한인 연방하원 의원’이라는 타이틀 구름 위에 붕붕 떠 있었다. 당선된 지 얼마 안 돼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내가 손대면 모든 게 술술 풀릴 것 같았다. 기자들과도 좋게 지내면 기사가 좋게 나올 것으로 봤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미국 언론의 생태계와 편향성을 알아야 하는 것은 공화당 정치인으로서 기본이었다. 이민자 사업가였던 내가 이런 점을 너무 모르고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다. 대다수 한국과 한인 언론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편향보도로 뒤덮인 주류언론이 공정하다고 많이 착각하고 있다. 제발 우파 언론과 대안 언론 등을 보고 공부하라고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는 한쪽 얘기만 듣고 보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한국인과 한인 이민자가 미국의 절반만 알고 다른 절반은 모르고 살고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 내용이나 오피니언이 신이 말한 것인 양 무조건 떠받드는 관습은 아주 잘못됐다. 언론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 말을 액면 그대로 기사화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에 자기 의견을 넣어 기사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특히, 치명적인 것은 앞뒤 맥락을 거두절미한 글이다. 한 번은 불우 학생들을 돕는 단체에 100달러를 기부하면서 “내가 부자라면 100달러가 아니라 1000달러를 기부하고 싶지만 안타깝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신문에 “김 의원이 앞으로 1000달러씩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고 보도됐다. ‘내가 부자라면’이라고 말한 전제 부분은 빼버리고 1000달러를 기부하겠다는 말만 보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 보도 뒤 여러 자선단체로부터 1000달러씩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로 따졌더니 그 이튿날 신문에는 “김 의원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했다”고 보도했다. 따지면 따질수록 나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언론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수많은 정치인이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등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승소한 적이 거의 없다. 언론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자가 고의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그런 기사를 썼다는 증거가 없으면 소송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의로 썼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측근들은 내 정치인생도, 연방의회 활약상도 LA타임스 기자 한 번 잘못 만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됐다고 한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미국의 거대 주류언론들은 진보 성향이 뚜렷했지만 한국의 대형 언론들은 보수 성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또 미국 언론들은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반면, 한국 언론들은 그래도 인정사정없이 공격하는 기사는 피하려는 노력이 역력히 보인다. 리처드 닉슨(공화)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은 기자들의 취재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이 사건을 백일하에 드러내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퓰리처상을 탔을 뿐만 아니라 단번에 유명인사에 백만장자가 됐다. 미국 주류언론은 인기주의로 쏠리는 경향이 크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언론들은 독자를 흥분시킬 수 있는 흥미진진한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사냥을 다니는 굶주린 늑대와 다르지 않게 됐다. 이제 막 의회 생활을 했는데 연방수사국(FBI) 조사를 받는 처지에 놓인 게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오랜만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나의 오만함을 용서해주세요.” 한참을 기도하고 나니 마음속에 평안함이 왔다. 기운을 차렸다. 나를 향한 공격에 꿋꿋하게 맞서기로 했다. 선거법을 잘 모르고 잘못한 게 있다면 나의 실수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29

[김창준] '이겼다'…나는 멍하니 팔만 높이 들었다

전국 휩쓴 클린턴 열풍 불구 압도적 승리 200불 들고 미국행 32년만에 일군 성과 예비선거 3주 전. 신문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가 또 1위였다. 척 베이더가 2위 짐 레이시가 3위였다. 두 후보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서로를 향한 공격에 혈안이었던 이들은 나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선거의 고비는 마지막 일주일이다. 각 후보가 끝까지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던지는 타이밍이다. 한순간에 모멘텀을 타거나 잃을 수 있다. 선거 참모들과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짰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 일주일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투표일. 가장 최근 여론조사에서 내가 1위를 했지만 진짜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개표에 앞서 스스로에게 마음을 비우자고 했다. 초반부터 치열했다. 베일러 후보와 막상막하였다. 밤 11시가 넘어 부재자 투표함이 집계되면서 내가 베일러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격차는 더 벌어졌다. 순간 선거 캠페인 운동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결국 내가 베일러 후보를 10% 포인트 차로 누르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됐다. 하원의원 본선은 11월 첫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해 대통령 선거도 열려 관심은 뜨거웠다. 내가 출마한 41지구는 공화당 우세 지역이라 처음에는 안심했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빌 클린턴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의 인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공화당원인) 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런데 기우였다. 선거일에 나는 49% 득표율로 민주당 후보를 완파하고 당선됐다. 한인사회가 그토록 염원하던 최초의 한인 연방하원의원의 꿈을 이룬 것이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높이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 언론에서도 나를 두고 '역사를 장식한 영웅'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지금 와서 솔직히 말하건대 운이 좋아 당선됐다. 모든 여건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선 배경에는 열심히 도와준 많은 친구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한인 힘이 더 컸다. 1993년 1월4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 섰다. 겨울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가슴 속엔 뜨거운 열정이 넘쳤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지 32년. 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내가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연방하원의원으로 등원하는 첫날이었다. 내 가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와 숫자 '103'이 새겨진 의원 배지가 달려 있었다. 103차 의회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을 떠나 빈털터리로 낯선 이역만리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지 꼭 32년. 연방하원의원 배지를 달고 미합중국 수도 워싱턴DC에서 관광객이 아닌 의원 자격으로 의사당을 향해 걸어가는 내 마음속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폴리 하원의장이 주관한 취임선서에서 처음 선서를 한 초선의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110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의사당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가운데 우뚝 솟은 돔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돔이 있고 그 양 옆에는 하원의사당(남쪽)과 상원의사당 (북쪽)이 있다. 돔 밑은 로툰다(Rotunda: 둥근 천장의 홀)가 있다. 천장과 벽은 온통 미국 역사를 설명하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고 양쪽에 있는 조그만 로툰다 내부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동상이 가득 자리 잡고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건물이 160여년 전인 1846년에 준공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컴퓨터는 물론 전기 전화도 없던 그 시대에 말과 밧줄로 이처럼 웅장한 건물을 세웠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남쪽 길 건너에는 세 개의 하원 건물 북쪽에는 세 개의 상원 건물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연방대법원이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옆에는 두 개의 의회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이 모든 건물은 지하로 연결돼 있는데 지하 벽은 원자폭탄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워낙 오래된 데다가 통로가 너무도 복잡해 지하에서 헤매는 관광객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도 첫 3개월 동안에는 지하통로에서 계속 방향을 잃고 헤맸다. 상원과 하원 건물들은 모두 지하 전기 기동차로 연결돼 있다. 본당에서 투표가 없는 한 관광객들도 이것을 탈 수 있는데 항상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의사당 빌딩 안은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의회 등원 첫날. 나는 공화당 의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2층 방청석도 꽉 찼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본회의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온 의원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 옆에 서 있었지만 팔에 안긴 아이들도 있었다. 회의장 안 분위기는 도떼기 시장 같았다. 신성한 의사당에서 엄숙한 개회식을 예상했던 탓인지 그 분위기에 더 놀랐다. 7년 전 사업관계 일로 워싱턴에 왔다가 관광 겸 의사당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2층 방청석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본회의장을 내려다봤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의원이 돼 아래층 의사당에서 2층 방청석을 올려다보게 되다니 정말 사람의 팔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산 싸구려 여행 가방을 들고 왔다가 LA 국제공항 바닥에서 가방이 터지면서 짐이 모조리 쏟아졌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님이 정성스레 볶아 챙겨주신 고추장 병이 터지고 김이 사방으로 날렸는데 이를 하나씩 집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그때의 망신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나는 연방의원으로서 성심껏 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나는 선서를 하기 위해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앞에 섰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원의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당신은 미국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직무를 훌륭하고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와 함께 동행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게 다 하나님 뜻이었다. 나는 시의원과 시장을 거치면서 단 한 번의 낙선 없이 공직에 줄줄이 당선됐다. 취임선서가 끝나고 공화당 원내대표 권고로 103차 회기 개원 첫 발언을 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15

[김창준] 진심 담긴 연설에 단박에 지지율 꼴찌서 1위로

'이민자 영어' 불구 진솔한 내용에 청중들 감동 선거 기간 LA폭동…'강한 한인' 이미지 덕 봐 첫 유세장. 나는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고 직업이 엔지니어라고 나를 소개했다. 뜻밖에 그 대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엔지니어는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흥미롭게 나를 지켜봤다. 나는 회사를 운영하는 CEO이며 공항 건설을 공약을 내걸었다. 시장으로서 내 치적도 얘기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시민권을 땄다고 했다. 시민권을 받은 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자 청중이 출렁였다. 그 대목에서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눈물샘이 터졌다. 청중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미국 시민권을 받고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후보 중 누가 애국심이 가장 강한지, 비교해 보십시오. 시민권을 받고 이렇게 감동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곳곳에서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음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1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서툰 영어가 오히려 제대로 먹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안 하는 얘기가 분명 어필했다. 다른 후보들은 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느니, 변호사로서 이런저런 활동을 했다느니 하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연설 내용이 워낙 대조적이었고 말도 짤막짤막하니까 오히려 심금을 울렸던 모양이다. 가장 걱정했던 토론은 오히려 내게 용기를 준 계기가 됐다. 솔직한 게 역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 ‘거짓말쟁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욕을 먹건 말건, 무조건 솔직하게 얘기하자’가 내 신조였다. 토론을 하면서 앞으로도 일생을 그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때 이후 연설이나 토론 때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선거운동에 한창 몰두하던 중 LA 폭동이 터졌다. 출마 후 내게 닥친 첫 번째 정치 시험대였다. 이 사건에 대한 대처는 선거 캠페인에 상당한 탄력을 줬다. 무엇보다 폭동은 한인들에게 미국사회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2년 4월 29일. 나는 마침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다이아몬드바 시 집무실에 앉아 다음 주로 예정된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운영하는 토목 설계회사 ‘제이 김 엔지니어스(Jay Kim Engineers, Inc.)’ 경리부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 직원들 급여가 은행 계좌에 아직 입금이 안 됐으니 빨리 사무실로 와 달라는 급한 전화였다. 그런데 사무실 밖에는 화가 잔뜩 난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시장이 뭘 하는 거냐” “어째서 우리 동네는 길 청소를 하지 않느냐” “길이 얼마나 더러운지 지금 같이 가서 보자” 등 막무가내로 내게 항의했다. 그렇게 복도에서 한동안 왈가왈부 실랑이를 하는데 갑자기 비서가 경찰서장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고 했다. 경찰서장은 LA 다운타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다이아몬드바 시는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LA에서 불과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 우리 시에서도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속으로 ‘오늘은 계속 뭔가 안 풀리는 날이구나’ 하며 달력을 봤다. 4월 29일이었다. 불현듯 어려서 서울에서 본 4·19혁명 생각이 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뛰어다니던 대학생들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인 이기붕씨의 서대문 집에 들어가 가구들을 모두 끌어내 불을 지르고, 이기붕씨 아들이자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했던 끔찍한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4·29 폭동은 우리의 4·19 혁명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날 오버랩이 됐다. 나는 LA 경찰만으로는 폭동 진압이 어려울 것에 대비해 주변 도시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 시 경찰도 비상대기 상태에 있도록 지시했다. 경찰차를 타고 바로 LA로 향했다. 한인타운 올림픽 가에 도착하니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해병대 군복에 공기총을 든 한인 젊은이들이 달려와 나를 에워싸며 환영했다. 이들은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해병대 출신 한인들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LA 한인 상가는 올림픽 가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퍼져 있어 마치 남쪽에 사는 흑인들이 북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백인들을 향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흑인 폭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한인 상가들이었다. 한인 상가는 식당과 가발 가게, 세탁소, 주유소, 가구점 등으로 라틴계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업소가 주를 이뤘다. 흑인들이 남쪽에서 북쪽의 백인 지역으로 올라오려면 한인 타운을 통과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남미 출신 주민들도 한인 상가를 부수고 맥주와 의류, 텔레비전 등을 약탈해 가는 모습이 뉴스를 통해 계속 나왔다. 한인 상가는 난장판이 됐고 사방이 불바다였다. 해병대 복장을 한 ‘한인타운 지키기’ 결사대들이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공기총을 쏘면서 한인 상점들을 보호하는 장면도 텔레비전에서 중계됐다. 마치 6·25 때 시가전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미국이란 말인가. 많은 미국인은 이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선 용감한 한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들 덕에 단지 한인이라는 이유로 덩달아 영웅 취급을 받았다. 내 선거운동도 이 사건으로 더 탄력을 받았다. 한인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와 피해를 안겨준 미 역사상 최악의 흑인 폭동. 그런데 그 사건이 내게는 연방 정치무대 진출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는 억수로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08

[김창준] 한인 첫 연방의원, 난 역사에 도전장을 던졌다

'庶政刷新(서정쇄신)'. 정치적 폐단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애초 그가 정치무대에 뛰어든 이유다. ‘다이아몬드바 최초의 아시안 시장’ ‘한인 최초 연방하원의원’은 목적지를 향한 과정에서 따라붙은 수식어지 목표가 아니다. 김창준(82) 전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은 1939년 3월 27일 서울시 청운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4·19 혁명 등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어려서부터 남다른 끼는 있었다. 중학교 시절 배우 이순재와 연극도 했고, 명동 한복판에서 지루박을 추며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1958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군 제대 후 1961년 유학길에 올랐다. 단돈 500달러를 들고 캘리포니아로 온 그는 낮에는 채피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이민생활은 어려웠다. 서툰 영어는 모든 환경을 어렵게 했다. ‘내가 뭐하러 미국에 왔나.’ 입버릇처럼 하던 자문은 곧 후회로 돌변하곤 했다. USC에서 토목공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전국에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1976년에 고속도로와 하수처리 사업 설계 전문 회사인 ‘제이 킴 엔지니어스’를 설립했다. 1990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이듬해 시장에 당선됐다. 1992년 한인 최초의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는 3선에 성공했다. 이후 20년간 연방의회에 한인이 없었다. 그가 한인 정치의 선구자였음을 방증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정치, 경제 선진화 취지로 김창준정경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새로운 환경은 거센 풍랑이다. 이를 타고 넘어갈 때 기회가 온다”는 그의 인생 스토리에 들어가 본다. 다이아몬드바 시장 시절 지역구 신설 용기 지지율 꼴찌·영어 핸디캡, '정직'으로 돌파 1992년 2월 초. 나는 연방하원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인구 8만의 작은 백인 도시였던 LA 동부 지역 다이아몬드바(Diamond Bar)에서 최초의 아시아계 시장으로 선출돼 1년간 재직하면서 행정 경험이 있던 나는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은 열정이 생겼다. 또 이민 1세 한인으로 사상 최초의 연방하원 당선이라는 새 역사에 도전할 욕심도 솔직히 있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연방하원 지역구는 인구 60만명을 대변한다. 마침 절호의 기회가 왔다. 가주 인구가 해마다 늘어나 연방 하원의원 의석이 2개 늘었다. 한 석은 북가주, 한 석은 남가주에 추가로 배정됐는데, 내가 시장으로 있는 지역구였다. 현역 의원이 없는 새 지역구가 구획된 것이다. 선거전략을 세워야 했다. 캠페인 매니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과거 몇 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는지 기록을 꼼꼼히 살핀 뒤 밥 구티라는 베테랑 선거 전문가를 채용했다. 구티를 만나보니 체격이 작으면서도 체중은 많이 나가는 친구였다. 공격적인 선거전략가로 소문난 인물답게 인상이 예리했다. 바로 상대 후보 분석에 돌입했다. 가주 하원의원인 정치 베테랑 척 베이더를 유력 후보로 지목했다. 변호사 짐 레이시도 만만치 않은 후보라고 했다. 연방 상무부 소속 변호사 출신으로, 언변이 뛰어났다. 연방 정부 제도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이외 4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첫 번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꼴찌였다. 그것도 한참 뒤처졌다. 베이더가 70%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달렸고, 짐 레이시가 20%로 2위였다. 나는 지지율 5%로 3위, 꼴찌였다. 순간 앞이 캄캄했다. ‘괜히 출마해서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처음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안 좋게 나왔다고 포기하는 것은 더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에서 희망을 봤다. 유권자들이 직업 정치인과 변호사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한 것이다. 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고 언변으로 먹고사는 변호사도 아니었다. 내 직업은 엔지니어였다. 당시 연방의회에는 엔지니어 출신 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내 직업을 어필하기로 했다. 선거 공약은 크게 2개로 압축했다. 첫째는 ‘정부도 민간기업 같이 운영해야 한다’는 것. 기업은 적자로 부도가 나면 문을 닫는다. 그런데 정부는 적자가 나면 ‘돈을 더 찍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업이 적자가 나면 물건값을 올리는 대신 비용을 줄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정부도 적자가 나면 세금을 올릴 게 아니라 지출을 줄여야 한다. 둘째는 워싱턴 DC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연방 하원의원이 너무 오랫동안 워싱턴에 머물면 타성에 젖는다. 또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서 3선 이상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임기 제한(term limit)’을 지역민에게 약속했다. 내 선거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됐다. ‘수십 년을 정치로만 소일한 낡은 정치인을 워싱턴으로 보낼 것이냐 아니면 70% 이상이 변호사인 연방 의회에 또 한 명의 변호사를 보탤 것이냐.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직업 정치인도, 변호사도 아닌 CEO 출신의 나를 의회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CEO 출신 정치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또 여론조사 2위를 달리던 레이시는 내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1위로 앞서가던 베이더 의원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나는 이런 두 사람의 다툼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손뼉을 치며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나는 정부도 개인이 사업하듯 운영한다면 천문학적 규모의 적자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이아몬드바 시장으로서 내 업적을 내세웠다. 인구 8만명 규모의 도시면 보통 공무원이 200여 명 정도 된다. 그런데 우리 도시는 모든 서비스를 개인회사에 하청(outsourcing)해 시 직원이 20명 남짓했다. 특히 다른 도시들이 재정적자에 허덕일 때, 우리 시는 남은 예산을 은행에 예금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것이 바로 정부를 개인기업 같이 운영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그래도 내심 항상 불안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토론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토론이 아니라 영어였다. 나는 한인 2세도 아니고 1세다. 또 백인 동네에서 거주하는 아시안이었다. 사실 ‘말’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해야 원활하게 나온다. 난 27세에 미국에 이민 왔다. 이민생활에서 영어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내 영어에는 한국어 억양이 강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후보 토론회 날이 왔다. 8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대부분 백인이었다. 나는 유일한 아시안 후보라 절로 튀었다. 토론 시작도 전에 ‘이 사람 도대체 누구냐’는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들렸다. 앞에 먼저 자신을 소개한 후보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두 후보 모두 자기들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끝없이 설명해 나갔다. 기가 죽었다. 몸이 얼어붙었다. 어느새 내 순서가 왔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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